역사는 곧 미래다
광명시는 1981년 시로 승격된 젊은 도시로 서울, 부천, 시흥, 안양과 인접하고 있습니다. 광명하면 1960년대 후반 개발이 된 광명 사거리 인근과 철산동 등을 떠올리곤 하지만, 사실 광명시의 시간과 공간의 폭은 이보다 훨씬 넓습니다.
그 100년의 시간을 돌아보는 시간! 경기도 '광명'의 100년 근대문화유산 역사 속에 담긴 장소들을 하나씩 살펴볼까요?
광명의 시작점 : 자연이 살아 숨 쉬는 설월리 마을
광명 소하2동의 설월리. 원래의 지명은 시흥군 서면 설월리였던 이곳이 바로 광명의 시작점이 된 곳입니다. 광명의 중심은 1968년 광명사거리 주거지가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점차 서울과 맞닿은 북쪽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구름산 아래에 위치한 이 작은 설월리 마을은 1971년 그 일대가 그린벨트로 지정되며 지금까지도 1960년대의 풍경 속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개발제한구역이었기에 대부분 단층 혹은 2층의 집들이 대부분이고, 옛길인 설월로의 양옆으로 자연스럽게 분포된 걸 확인할 수 있어요.
오래된 동네 슈퍼와 세탁소, 담장 앞 화분들과 집 주변 텃밭들은 이 곳에 멈춰버린 시간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답니다.
땅속 깊이 새겨진 고귀한 시간들 : 시흥광산, 그리고 광명동굴
구름산 남서쪽으로는 가학산이, 가학산에는 광명동굴이 있습니다. 현재 광명을 대표하는 관광지가 된 광명동굴은 원래 20세기 초 금광으로 개발된 시흥광산이었는데요. 20세기 초반 본격적인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금, 은, 동의 주요 광물을 채취하는 대규모 광산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1962년, 노조 간부의 집단 해고와 노동운동 및 직장 폐쇄 등 노동문제로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면서도 10년이나 더 운영됐지만 1972년, 큰 홍수로인해 결국 광산을 폐쇄하는 지경에 이르면서 시흥광산의 채굴 작업은 멈추게 됩니다. 이후 소래포구 새우젓 저장소 등으로 일부 사용되다가 2011년에 이르러서야 보수, 복원 작업이 진행되어 광명동굴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죠.
동굴이라 이름이 붙어 있어 자연동굴을 떠올리기 쉬우나, 사실상 이곳은 근대기 광산 노동자들의 피땀 어린 노동의 현장과도 같은데요. 현재의 광명동굴은 관광지화되어 각종 전시와 체험 프로그램의 장이 됐지만, 동굴에는 아직도 광산으로 사용될 당시의 척박했던 노동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답니다.
지금의 광명동굴이 되기까지 이곳에 쌓인 광부들의 땀과 눈물을 기억하는 것도 광명동굴을 오래 마음에 담아둘 수 있는 또 하나의 특별한 방법이지 아닐까 싶습니다.
중심의 이동 : 사람을 위한 공간으로 거듭나다, 광명시청과 철산아파트
1981년 시흥군에서 독립 후, 광명시로 승격! 1983년 시민에게 친화적인 공간으로 조성된 광명시 청사와 시민회관이 완공됐습니다. 광명시청의 옥상정원에 오르면 북동쪽으로 철산동의 주공아파트들이 보입니다. 철산동 주공아파트는 1980년대 중반 건축된 것으로, 다양한 주택 시험들을 엿볼 수 있는데요.
그중 가장 눈에 띄는 타운하우스형 저층 주거동 아파트에는 30여 년의 시간을 지나며 각 세대 별로 취향에 맞게 꾸며둔 흔적들이 남아있습니다. 조만간 재건축에 들어갈 예정인 지역이지만, 1980년대 중반 공동주택에 대한 새로운 시도로 기록되며, 기억할 가치가 있는 곳임에 분명합니다.
광명시는 100년이라는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시흥 서면의 중심지로, 주요 광물의 산지로, 서울의 배후 주거지로서의 역할을 해오며 다양한 변화를 겪었습니다. 광명역세권 개발과 철산주공아파트 재개발로 광명의 또 한번의 급격한 변화가 눈 앞에 다가온 상황에서 광명의 100년을 돌아보며 기억을 되새겨 보는 건 어떨까요?
출처 ▶ 경기문화재단 지지씨 (ggc.ggcf.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