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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의그날] 함께이룬 3월의 더 큰 꿈

재판기록으로 본 광명지역 3.1만세 운동

  • 기자명 시민필진 배미현
  • 승인 : 2019.04.16 10:14
  • 수정 : 2019.04.16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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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8일 소하2동 주민센터에서는 '재판기록으로 본 광명지역 3.1만세 운동' 이라는 주제로 광명지역 독립만세운동 강의와 소하 역사 인문벨트 특별 연극 '광명의 그날' 공연이 있었다.
3월 28일 소하2동 주민센터에서는 '재판기록으로 본 광명지역 3.1만세 운동' 이라는 주제로 광명지역 독립만세운동 강의와 소하 역사 인문벨트 특별 연극 '광명의 그날' 공연이 있었다.
양철원 학예연구사
양철원 학예연구사

 

 

광명의 그날, 3월 만세운동

191931일.

서울을 비롯하여 평양, 진남포, 안주, 의주, 선천, 원산 등지에서 동시에 민족해방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만세 시위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하여 학생들도 운동에 동참한다.

거세지는 만세운동의 여파에 조선총독부는 학교마다 휴교령을 반포하고 학생들은 고향으로 내려갔다.

 

휴교를 내리면 잠잠해지겠지.’ 라는 조선총독부의 판단은 오판이었다.

 

 

서울 이화학당에 재학 중이던 유관순 열사는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와 수천 명의 군중들, 동지들과 함께 아우내 장터를 누비며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짖었다.

서울 배재고등학교를 다니던 최호천, 윤의병도 휴교령으로 학교가 문을 닫자 고향인 광명시 소하리로 내려갔다.

 

 

우리 손에 든 건 고작

태극기 하나 뿐이야.

 

최호천 : 경성 소식 들었니?

만세운동에 참가한 여학생들은 옷이 다 벗겨져 거리 한복판에서 능욕을 당한다 하고, 감옥소 안에서 더 말 못 할 끔찍한 일들이

어떤 학생은 시위에서 태극기를 흔들었다가 그 자리에서 칼로 죽임을 당해.

마을에선 건물 안에 주민들을 가둬놓고 불을 지르고. 이건 그냥 학살이다.

 

이정석 : 일본 놈들도 전국에서 벌어지는 이 만세운동이 심상치 않다는 걸 느끼는 거지.

호천아, 더 늦기 전에 우리도 빨리 동참을 해야 하지 않을까?

 

최호천 : 정석아, 일본은 우리가 생각한 거 이상으로 점점 더 잔인무도해지고 있어.

일본 놈들은 총과 칼로 우리를 위협하는데 우리 손에 든 건 고작 태극기 하나 뿐이야.

 

이정석 : 그 태극기로 일본을 상대하는 거잖아. 그게 우리 정신이구.

 


대한 독립 만세!”

327일 저녁 630분경, 설월리 어둑한 동네에 만세 소리가 울려 퍼진다.


 

스물한 살의 청년 이정석 군이 혼자 만세 시위를 하며 동네를 누비고 다닌 것이다.

상황을 전해 듣고 출동한 일본순사는 어둑해진 설월리 동네에서 이정석을 찾지 못하고 돌아갔고, 다음날 328일 낮, 이정석을 찾아내어 체포한다.

 

이정석이 일본 순사에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설월리 동네 주민들은 분개하고 분위기가 술렁술렁해진다.

이정석의 아버지 이종원(56)은 고심 끝에 이정석의 친구 최호천을 찾아가 이 사태에 대해 의논한다.

 

 

최호천 : 죄송합니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전 두려웠습니다. 정석이가 저렇게 된 건 다 저희 때문입니다.(중략)

숨어 살면 모른척하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미칠 거 같아요.

 

이종원 :호천아, 시간이 지나면 다 잊혀 진다. 우리 어른들도 다 그렇게 살았어.

이 가슴 찢어질 것같이 아픈 것도 시간이 지나면 다 잊혀져. 네가 아직 어려서 잘 몰라서 그래.

 너희들은 죽는 게 두렵지도 않냐? 무섭지도 않아?

 

 

20명이 200명으로

최호천은 노온사리 주재소를 습격해 이정석을 구출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근처에 살던 윤의병도 합류한다.

설월리 동네 주민들도 이정석 구출계획에 동참하고 면사무소 주변으로 동네주민 20명 정도가 모인다.

 

최호천이 통솔하고 윤의병이 솔선하여 군중은 함께 소하리 면사무소 부근으로 이동한다.
최호천이 통솔하고 윤의병이 솔선하여 군중은 함께 소하리 면사무소 부근으로 이동한다.
"10년이 지나도 100년이 지나도 오늘 이날을, 광명의 그날을 꼭 기억해줄 겁니다."
"10년이 지나도 100년이 지나도 오늘 이날을, 광명의 그날을 꼭 기억해줄 겁니다."

 

 

면사무소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참여하면서 인원이 50명 정도로 늘어나기 시작하고 가리대 주민들도 규합하여 참가인원은 100명 정도가 된다.

이들은 이정석 구출에만 그치지 않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자는 만세 시위 운동도 계획한다.

주재소로 가는 도중 참여 인원은 계속 늘어나 약 200명으로 불어난다.

 

최호천 : 우리가 주재소를 습격해 정석이를 구출하고 만세를 외치면 일본 놈들은 우리에게 총을 쏠 수도 있습니다.

평안도에서는 주재소에 찾아간 사람들 전부 총으로 쏴 죽였다고 합니다.

 

주민들 : 그러니까 우리가 다 같이 가는 거 아니냐. 퇴각하지 말고 대항해서 돌을 들고 싸웁시다!

 

굳은 결의를 하고 금당마을 산길을 타고 돌아 밤 11시경, 최호천과 윤의병과 200여명의 주민은 주재소에 도착한다.

주재소의 흙벽에 돌을 던지고 몽둥이로 두드리자 구멍이 생긴다.

 

부당하게 체포된 이정석을 석방하라!”

최호천과 윤의병, 동네 주민들은 강력하게 항의하며 적송 순사와 협상을 시작한다.

 

 

1930년 서면 공립 보통 학교(현재 서면초등학교) 사진
1930년 서면 공립 보통 학교(현재 서면초등학교) 사진

 

최호천, 윤의병과 마을 주민들은 주재소 부근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고 지금의 서면초교(당시 보통 학교) 뒤편에서도 만세를 부르짖고 해산한다.

다음날, 329일 영등포 경찰서 본부에서 출동한 경찰들이 만세 시위 운동의 주동자 일곱 명을 체포해 구속하고 이들은 재판을 받게 된다.

 

 

적송 순사가 작성한 재판기록
적송 순사가 작성한 재판기록

 


1919년 지방법원, 복심법원, 대법원 3심 재판 판결내용


○최호천(21, 예수교도)-징역 2(소요죄)

○윤의병(20, 학생)-징역 2(소요죄)

○이종원(56, 농업)-벌금 30(중한구금자 탈취 미수죄)

○유지호(28, 농업)-징역 16(중한구금자 탈취 미수죄)

○최정성 (22, 농업)-벌금 30(중한구금자 탈취 미수죄)

○김인한(21, 농업)-징역 16개월 (중한구금자 탈취 미수죄)

○최주환(35, 농업)-징역 16개월 (중한구금자 탈취 미수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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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석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재판까지 가지 않고 풀려난 것으로 추정된다.

윤의병은 출소 후 광명시에서 소하리 주민들과 함께 계몽을 위한 사회적 활동을 계속해 간 것으로 보인다.

 

길은 험하고 험해도 자유를 위해 싸우리라.

조국을 믿고 따르리라.

꿈꿀 수 없는 날일지라도

힘껏 소리쳐 외치리라.

 

-이정석 대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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