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시정뉴스

“동네 농악패 꼬맹이 예인으로 우뚝서다” 1편

  • 기자명 광명시
  • 승인 : 2012.03.28 13:45
  • 수정 : 2012.09.17 14:5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임웅수 광명농악 보유자
생각보다 젊다. 이마에 굵은 주름이 선명하고, 머리카락도 희끗희끗한 나이 지긋한 어른일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그런데 전혀 딴판이다. 그의 첫 인상에 대해 털어 놓았다. 그러자 최근에는 무형문화재의 원활한 계승을 위해 보유자 지정 연령이 많이 낮아졌다는 설명으로 말문을 연다. 그와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채 이어가기도 전에 그의 휴대폰이 눈치 없이 끼어든다.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된 대화내용에는 축하인사가 대부분이다. 요즘 이런 축하를 받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짧은 한국예총 임웅수 광명시지부장(51). 그가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20호 광명농악 보유자로 지정된 지 벌써 한 달이 다 돼 간다.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도 그 날의 감동이 선명하다. 기쁨과 뿌듯함으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다. 하긴 광명농악 보유자 자리가 2006년 유인필 선생 작고 이후 6년 동안이나 공석이었다가, 이제야 주인을 찾았으니, 광명 예술계에 경사가 아닌가. 임 보유자 자신에게도 2000년 7월 전수조교 지정 이후 12년 만에 예인으로서 최정점에 올라섰으니 가문의 영광이다. 그래서 그는 아직까지는 축배의 잔을 내려놓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보유자로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할 때. 그동안 누린 기쁨보다 몇 곱절 더 무거운 책임감이 기다리는 위치에 앉은 그를 만났다. 우직하게 걸어온 그의 오십 평생 농악 인생과 20여년간 광명농악에 오롯이 쏟은 혼과 열정을 되돌아본다. 또 보유자로서 그의 어깨에 지워진 막중한 임무에 대한 각오를 들어본다.


스토리1“걷기 시작할 때부터 따라다녔던 농악패”
임 보유자의 고향은 충남 연기군 남면 진의리이다. 전체 500가구 정도 가운데 90%가 임씨들이 모여 사는 이른바 ‘임씨 동족 부락’에서 그는 나고 자랐다. 농사로 먹고사는 그 마을에서 농악소리는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 놀이 음악이자, 삶의 활력소. 들일을 나갈 때나 들어 올 때, 또 누군가가 이사 올 때나 집을 새로 지을 때, 설이나 추석 등 명절이면 으레 풍악이 온 마을에 울려 퍼졌다. 그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던 꼬맹이 중에 한 명이 바로 임 보유자였다.

임웅수 선생“그 당시 놀 거리가 뭐가 있었나요. 어른들이 농악놀이 한 판 벌일 때 동네 아이들도 끼어 한바탕 놀았죠. 무슨 건수만 생기면, 농악이 울리고, 마을의 막걸리가 동이 나도록 밤새 어른들이 웃고 떠들었죠. 어린 제게도 어찌나 신나고 흥겹던지, 저도 모르게 농악에 빠지고 말았어요.”

어른들이 내려놓은 꽹과리를 몰래 쳐 보기도 하고, 상모가 정신없이 돌아가며 그려내는 동그라미에는 넋을 잃기도 했다. 그의 농악 인생은 이렇게 시작됐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언제라고 할 것도 없이 걸음마를 떼는 것과 동시에 그는 이미 농악에 발을 담그고 있었던 것이다.

“초·중학생 때는 동네 친구들끼리 모여 주워들은 풍월로 농악놀이 흉내를 내곤 했어요. 중학교 때 서클 활동을 했는데, 동네 어르신 한 분 모셔다가 대충 설명 듣고, 따라하는 정도여서, 농악을 체계적으로 배우지는 못했죠. 그러다 보니 농악을 전문적으로 배워보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당시 공주 농업고교에 3년 장학금을 받고 진학했어요. 그 지역에서는 농악반이 있는 유일한 예술 학교였죠. 저의 본격적인 농악 인생은 그때부터 시작됩니다.”

임 보유자는 자신의 고교 시절을 ‘농악에 미쳐있었던 때’라고 기억했다. 눈을 뜨나 감으나 농악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의 두 손은 언제나 꽹과리를 쥔 모양새였다. 이를 보다 못한 그의 아버지는 농악 복장과 악기를 모두 아궁이에 쑤셔 넣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단다.

“밥벌이도 제대로 못하는 힘든 길을 가려는 아들을 보며, 부모님은 걱정도 많이 하시고, 숱하게 말리셨죠. 그래도 제 고집을 굽히지 않았어요. 사실 고등학교 때는 농악반의 규율이 너무 엄해 감히 그만둘 생각을 할 수 없기도 했고요. 게다가 저희 공주농고 농악반이 전주대사습놀이 등 전국대회 출전해 입상도 많이 하는 등 성적도 꽤 좋다보니, 그게 더 자극제가 되더라고요. 나중에는 선배들의 강제가 아니더라도 제 스스로 농악에 점점 더 심취하게 됐습니다.”

동네 농악패를 졸졸 따라다니던 꼬맹이는 농악이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열정 가득한 청년이 됐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농악 외길로 들어선다.
 
스토리2“패기와 열정으로 걸어간 농악 외길”
임 보유자는 고교 졸업과 동시에 정인삼 선생이 수장으로 있는 용인 한국민속촌 농악단에 입단한다. 정인삼 선생은 그가 고등학생 때 지도받았던 스승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본격적인 농악인의 길을 걷게 된다. 그의 주특기는 채상소고. 즉 소고를 치면서 상모를 돌리고, 재주넘기도 하는 이른바 농악의 꽃을 담당했다.

농악이 마냥 좋기만 하던 그에게도 방황의 시간은 찾아왔다. 군 입대를 앞두고 민속촌 농악단에서 나와 고향에 머무르는 동안 또 다시 부모님과 극심한 갈등을 겪은 것. 진로에 대해 심각한 고민이 물밀듯 밀려왔다.

“언제 영장이 나올지도 모른 채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다 보니, 솔직히 막막했어요. 친구들처럼 대학에 다니는 것도 아니고, 기술이라도 배워야 하는 건지 꿈과 현실 사이에서 고뇌의 나날을 보냈죠.”

임웅수 선생그러던 임 보유자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논산시 연산의 연산상고에서 농악반을 창단하면서, 그에게 지도자 제의가 들어온 것이다. 기회가 기회를 몰고 온 것인가. 아울러 충남대 농과대학 농악반까지 도맡으면서 그는 1년 남짓한 시간을 ‘선생님’으로 보내게 된다. 이 때 지도자 경험은 후일 그가 광명농악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는데 큰 도움이 됐다.
군 제대 후 1986년 그는 민속촌 입단 동기 5명과 ‘마당풍물놀이’ 팀을 결성하게 된다.

“서울 신당동에 연습실을 차리고, 8년간 활동했는데, 국·내외 공연 횟수가 1,500회에 이를 정도로 왕성하게 공연을 했습니다. 이때는 제가 전문 농악인으로서, 농악에 대해 심도 있게 연구하고, 공부하는 시점이기도 했어요.”
임 보유자는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의 홍보 사절단으로 북미, 아시아, 유럽 등 세계를 누볐다. 그는 자신들의 팀은 실력 면에서는 국내 1위라고 할 수는 없었다고 했다.

“그 당시 저희 팀은 김덕수 사물놀이패 등과 더불어 국내 다섯 손가락 안에 꼽혔는데, 가장 젊은 팀이었어요. 때문에 경력이 짧아 노련하고, 화려한 기술을 뽐내지는 못했죠. 그렇지만 패기가 남다르다 보니, 무대에서 관객과 호흡하는 퍼포먼스가 좋은 평가를 받아, 국내외 수많은 무대에서 전성기를 보냈죠.”

그야말로 재미와 흥으로 점철되는 20대였다. 돈을 모을 줄도, 잇속을 챙길 줄도 몰랐다. 자신과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과 한데 어우러져 신명나게 노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던 나날들이었다.
 
스토리3“광명에 발 들이다”
1990년 늦가을 임 보유자의 운명을 뒤바꿀 만남이 있게 된다. 중요무형문화재 서도소리 보유자인 이춘목 선생이 신당동으로 임 보유자를 찾아 온 것이다.

“이 선생님이 저를 찾아오셨다고 하기 보다는 저희 마당풍물놀이 팀의 명성을 듣고 오셨다고 하는 게 맞는 말이겠네요. 그때 이 선생님은 저에게 장구를 배우셨는데, 왔다 갔다 하며 배우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으셨는지, 저보고 아예 광명으로 넘어 오라고 하시더라고요. 그게 1991년 3월입니다. 제가 광명으로 오는 바람에 저희 마당놀이패도 해체되고 말았어요.”

광명농악임 보유자가 광명에 왔을 때는 고 유인필 선생을 중심으로 일반시민들이 취미활동처럼 광명농악을 즐기고 있었다. 임 보유자는 광명에 오고 난 이듬해 도당놀이로 경기도 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전, 입상 했으나, 전국 출전은 좌절됐다.

그런데 임 보유자는 이때 입상보다 더 큰 소득을 얻게 된다. 전국 각지에서 제 고장의 민속놀이를 들고 나와, 혼신을 다해 경연을 펼치는 모습을 보면서, 그 동안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게 된 것이다.

“그때까지 저는 무대에서 보여주는 농악, 박수 받는 공연만을 했더라고요. 그런데 사라지고 묻혀있는 우리 전통 놀이를 찾아내, 그것이 요즘 사람들 생활 속에서 살아 숨쉬고, 후대에 면면히 이어가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역할을 하는 전통 예술인들을 접하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어요. 사명의식을 갖게 된 것이죠. 또 앞으로 제가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도 다시 알게 됐어요.”

-2편 계속- “동네 농악패 꼬맹이 예인으로 우뚝서다”



저작권자 © 광명시 뉴스포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제3유형:출처표시+변경금지 위 기사는 "공공누리"제3유형:출처표시+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