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찮은 잎사귀에서 이런 깊은 소리가!”
온 몸의 피가 얼굴로 죄다 모이는 듯하다. 얼굴이 어느새 붉게 변하고, 목의 힘줄마저 도드라진다. 급기야 어지러움을 느낄 무렵, 드디어 소리가 났다.
“마치 대금이나 단소 소리 같아요. 날카로운 듯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게, 판소리도 생각나고, 옛날 궁중음악도 떠오르네요.”
입술에 나뭇잎을 붙인 채 있는 힘껏 바람을 불어내던 광명시 안서중학교 3학년 승세현 학생. 소리를 내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성공하자, 비로소 싱글벙글 웃는다.
같은 학년 김동민 학생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뭇잎이 이렇게 훌륭한 악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엄청 신기하다”면서 “오늘 배운 대로 집에 가서도 가족들 앞에서 도전해보고 싶다”며 색다른 경험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 12일 오후. 안서중에서는 좀 특별한 음악수업이 진행됐다. 초적 연주가 정재영(39)씨의 특강이 있었던 것. 초적이란 풀피리를 일컫는 말이다.
수업이 시작되자, 갓과 도포차림을 한 젊은 강사가 교실로 들어섰다. 그는 이어 사철나무 가지를 꺼내 들어 입술에 대더니,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구성지고, 현란한 음계의 초적 연주를 선사했다.
이날 수업에는 수강을 희망한 3학년 학생 40여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눈이 휘둥그레져 연주를 듣던 학생들은 연주가 끝나자, 박수를 쏟아내며, 탄성을 터트렸다.
이어 연주에 적합한 잎을 고르는 방법과 소리를 내는 요령에 대한 정씨의 설명이 계속됐다.
“홍콩야자 잎이나, 사철나무 잎, 벤자민, 귤나무 잎 등 적당한 면적의 수분을 함유하고, 탄력이 좋은 잎이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바람을 견디는 힘이 좋아 악기로 적당해요. 그렇다고 아무 잎이나 사용하면 독소로 인해 입술이 부어오르기도 합니다. 크랩톤 같은 잎은 심지어 호흡곤란까지 일으킬 수 있으니, 주의해서 골라야 합니다.”
악기를 선택했으니, 이제 직접 연주를 해 볼 차례.
조별로 삼삼오오 모여 앉은 학생들이 정씨의 가르침에 따라 열심히 입 바람을 후후 불어댄다.
“자! 제 입술을 잘 보세요. 나뭇잎을 아랫입술에 틈이 생기지 않게 완전히 밀착시킵니다. 그리고 윗입술과 나뭇잎 사이에 미세한 간격을 두고 바람을 불어내면, 잎의 떨림에 의해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소리가 날 수 있는 적당한 간격을 찾아내는 게 연주 포인트입니다.”
여기저기서 ‘삐~ 삐~’ 하며 성공을 알리는 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도무지 불가능할 것 같던 일이 이뤄지자 학생들 스스로도 재미가 들려, 너도나도 입술 바람 불기에 한창이다.
턱밑까지 차오른 호흡을 가다듬은 이대희 학생이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말한다.
“어떤 잎이든 괜찮다고 해서 상추도 가져와 봤는데, 여기서도 소리가 나네요. 쌈을 싸먹는 케일 같은 채소 잎도 신선하기만 하면 악기로 손색이 없다니, 직접 해봐야겠어요.”
이날 수업은 안서중 이옥경 교장선생님이 발로 뛰어 만들어낸 기회다.
이 교장은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서도 학생들이 음악을 접하고, 재능을 기를 수 있는 방법을 고심하던 차였다. 그러던 중 언론에 소개된 정씨의 기사를 며칠 전 우연히 접하고, 곧바로 전화 수화기를 들었다.
이에 정씨는 공연 준비로 시간을 쪼개기가 만만치 않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 교장의 열의에 반해 흔쾌히 특강 수업에 나선 것이다.
정씨는 “초적은 조선 성종 때 펴낸 ‘악학궤범’에서 그 기록을 찾을 수 있는 전통 향악기”라면서 “무려 500년이 넘게 맥이 끊겼었는데, 1934년과 1935년에 남도 명창 강춘섭 선생이 발표한 2장의 음반을 통해 되살아났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이 음반은 국내에 현존한 유일한 초적 유성 음원으로, 이를 바탕으로 동생 정재룡(37)씨와 함께 지난 2000년부터 초적 소리 복원에 몰두해 오늘에 이르렀다”고 덧붙였다.
이날 정씨는 진도아리랑과 같은 국악은 물론, 학생이 연주하는 장구 장단과 춤사위에 맞춰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는 “음악은 시대와 세대를 초월하는 소통의 매개체”라며“ 특히 초적은 누구나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악기로 삼아 연주 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매력적”이라고 했다.
그는 또 “현재 초적을 알리고, 계승자를 찾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중인데, 오늘 특강 역시 그 일환이며, 열심히 참여해 준 학생들 덕분에 즐거운 시간이 됐다”며 “오늘 수업에 참여한 학생들 중에 향후 내 후계자가 배출된다면 그 또한 보람 있고 고마운 일”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한편 이날 이뤄진 정씨의 이색 특강은 KBS 2TV를 통해 방송될 예정이다. 방송 시간은 오는 16일이며, 오전 8시부터 방송되는 아침 뉴스타임의 ‘화제 포착’코너에서다.
글/진시민필 홍선희 사진/광명시 홍보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