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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을 위한 그날의 함성, 광명의 3 ·1운동

  • 기자명 시민필진 김창일
  • 승인 : 2014.03.04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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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 사진은 행사장에 전시된 3.1운동 관련자료 입니다.

1919년 3월 1일 우리나라에서는 일제에 맞서 전국적인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95년이 지난 지금 3·1 운동은 기념일로 남아있다. 기념일이란 말 그대로 어떤 날을 기리기 위해서 기억하는 날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임시헌장(1944) '서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우리 민족은 우수한 전통을 가지고 스스로 개척한 강토에서 유구한 역사를 통하여 국가생활을 하면서 인류의 문화와 진보에 위대한 공헌을 하여왔다. 우리 국가가 강도 일본에게 패망된 뒤에 전 민족은 오매에도 국가의 독립을 갈망하였고 무수한 선열들은 피와 눈물로써 민족자유의 회부에 노력하야 삼일대혁명 이르러 전민족의 요구와 시대의 추향에 순응하야 정치, 경제, 문화 기타 일절 제도에 자유, 평등 및 진보를 기본정신으로 한 새로운 대한민국과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가 건립되었고 아울러 임시헌장이 제정되었다.(강조-인용자)"
(참조 :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63265)

위에서 보듯이 대한민국임시헌장에는 '삼일대혁명'이라는 용어로 기재되어 있다. 혁명의 사전적인 의미는 '헌법의 범위를 벗어나 국가 기초, 사회제도, 경제제도, 조직을 근본적으로 고치는 일 또는 이전의 관습이나 제도, 방식을 단번에 깨뜨리고 새로운 것을 세우는 일'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혁명이라 불리는 시민혁명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영국의 명예혁명, 미국의 독립혁명, 프랑스의 시민혁명을 말한다. 세계 3대혁명은 역사적으로도 큰 의의를 지니는 혁명이다. 이 혁명을 운동이라고 부르지는 않지 않는가?
1919년이 지나고 95년이 지났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잊지는 않았지만 올바른 인식 또한 중요하리라 본다.

 

 

광명시에서 독립운동 발원지는 노온사동이었다. 이곳에서 95년전 독립의 기운이 활활 피어올랐다. 독립의 기운이 가득한 이곳에 초등학교가 세워졌다. 그곳이 바로 지금의 온신초등학교다. 온신초등학교는 학교 용지를 기부 받았다고 한다.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독립운동의 발생지를 기억하고 이를 남겨주기 위한 모습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온신초등학교에는 3·1운동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어쩌면 기억에서 멀어질 수도 있는, 그리고 아는 사람만 알 수 있는 장소라 이 기념비가 애틋하고 한편으론 더 커 보이기도 했다.

이번 3·1운동 기념식에는 기념시와 기념무가의 퍼포먼스가 있었다. 시(詩)는 기호신님이 작시하고 낭독은 최평자님이 진행했다. 기념무는 독립운동의 슬픔과 투쟁, 전쟁의 모습을 담고 싶었고 단순히 추모만을 그리는 것보다 나와 우리가 하나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과거를 기리는 것이 대다수의 추모다. 하지만 이 추모를 너머 우리 민족이 하나라는, 시대를 거슬러 한 민족임을 나타내고 싶었다고 한다.

 

 

광명시의 3.1운동을 살펴보면 이렇다.
광명의 3·1운동은 자발적, 조직적 성격을 띄었다고 한다.
전국적인 3·1운동과 함께 일제의 토지조사사업 이후 이에 불만이 있던 농민들이 3.1 운동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소하리에 거주하던 이정석님이 노온사리 주재소 부근 (현재 온신초등학교 자리)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선동하다가 일본경찰에 연행되었고 치안법 위반죄로 노온사리에 구금되었다.

당시 배재보통학교에 다니던 최호천님과 윤의병님은 이정석님을 구출하기 위해 200여 주민들을 이끌고 노온사리 주재소를 습격하였고, 이후 폭력시위에 겁먹은 당직 순사가 이정석을 석방하겠다는 약속을 받았고 이후 해산하였지만, 일본경찰은 이종원, 최호천, 윤의병 등을 체포하여 갖은 고문을 하고 2~4년형을 선고했다.

일제에 의해 주동자로 체포된 주민들은 최호천, 윤의병, 이종원, 김거봉, 최정성, 유지호, 최주환 등 7명인데, 최호천, 윤의병은 학생이고 나머지는 농민들이었다.
훗날 윤의병은 출옥 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1983년 대통령 표창을,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그 외에 유지호, 최호천, 최주환은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 이종원은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 위 사진은 행사장에 전시된 3.1운동 관련자료 입니다. 

독립의 빛이 온 민족에게 퍼져 나온 것이 3·1혁명이다. 광명시에서는 온신초등학교의 부지가 바로 그곳이었다. 전국적으로 일어난 독립의 힘. 이 힘은 일제의 탄압에 맞서 우리 나라의 독립을 위한 한 줄기 빛이었다. 이 한 줄기 빛이 광명(光明)이란 이름이 갖는 또 다른 의미이지 않을까?

글/시민필진 김창일   사진/시 홍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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