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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학문과 겸손한 처신으로 신망 두터웠던 정원용 선생

오리 이원익, 민회빈 강씨와 함께 광명의 3대인물로 평가받아

  • 기자명 광명시
  • 승인 : 2014.05.08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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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와 경술, 문장에 능해‘경산집’,‘경산일록’, 백과사전 등 다수 저술
오리 이원익, 민회빈 강씨와 함께 광명의 3대 인물로 평가받아

 ▲ 1862년 정원용의 과거 합격 60주년(회방)을 축하하기 위해 철종이 내린 교지
노온사동의 사들 앞길인 광명로를 지나다 보면 구름산 자락에 두 개의 무덤이 있다. 왼쪽은 조선 후기 영의정을 지낸 경산 정원용(1783~1872)의 묘, 오른쪽은 아버지인 정동만(1753~1822)의 묘이다.

정원용은 동래 정씨를 관향으로 누대로 벼슬을 한 명문가 출신이다. 부모의 3년 상을 마친 1826년에 광명에 거주할 집을 짓고 새로 터를 잡았다. 그가 살았던 18세기 후반과 19세기는 소위 세도정치 시기로 오랜 세월 세력을 형성한 명문 집안들이 연합하여 권력을 분점하던 시기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뛰어나 당대의 문인들과 교유 관계를 맺었고 규장각 각신으로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 ‘순조대왕 어제’간행에 직접 참여했다. 문인들과 어울려 시 쓰기, 당시의 유행 사조인 바둑 등에 깊은 조예를 보여 문집인 ‘경산집’에 실린 시만 해도 290여 수가 넘고 다른 책들에 실린 것까지 합하면 400여 수가 넘는다.

정원용 선생의 의복, 호패 등 30점 국립민속박물관에 소장
그는 관직으로 평안도와 강원도, 함경도 관찰사를 지내며 백성들의 실정을 잘 살폈다. 이조·형조 판서, 영의정 등을 역임하며 균형 잡힌 인사를 하고 억울한 백성이 없도록 노력했다. 또한 지방관 시절에는 환곡의 폐단과 주먹구구식으로 늘어난 세금의 항목을 정리하는 등 뛰어난 행정능력을 보였다.

정원용은 지역사적인 면에서 많은 기록을 남긴 인물이란 점에서 의의가 있을 듯하다. 관직 시기의 공문집과 재판 기록, 중국 방문기, 백과사전 등을 남겼다. 특히 평생의 일기인‘경산일록’에는 광명 지역에 이주해 온 배경과 노온사동 지역의 옛 지명, 민속 등이 실려 있어 19세기 중반 지역사에 작은 실마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한편 중앙도서관의 향토행정사료관에는 가승 전적류 4권과 고문서류 632점이 있고, 국립민속박물관에는 선생의 의복과 호패 등 30점이 소장돼 있다.

  ▲ 노온사동에 위치한 경산 정원용(1783~1872) 묘

 
시 문화관광과 ☎ 2680-6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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