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영의정, 오리 이원익 대감
영원한 영의정, 오리 이원익 대감
  • 시민필진 옥연희
  • 승인 2015.05.26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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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 이원익 토크 콘서트 <영원한 영의정 이원익의 사상과 리더쉽>

 
광명을 대표하는 역사 인물을 들어 보라면 광명시민 대부분이 오리 이원익(1547 ~1634) 대감을 말할 것이다.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고자 대동법을 추진했고, 높은 벼슬을 지냈으면서도 비가 새는 초가집에 살았던 선생의 삶은 오늘을 사는 공직자는 물론 우리 모두에게 교훈을 준다. 하지만 이원익 선생은 한, 두 가지 알려진 역사적 사실 이외에 이렇다 할 관심을 받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올해로 24회를 맞이한 광명의 대표 축제인 오리문화제에서는 선생의 삶과 업적을 본격 조명하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지난 515, 광명시청 대회의실에서는 오리 이원익 토크 콘서트 <영원한 영의정 이원익의 사상과 리더쉽>이 열렸다. 강의를 맡은 건국대 교수이자 KBS <역사저널 그날>의 진행자인 신병주 박사는 우리가 미처 몰랐던 이원익을 쉽고도 친근한 설명으로 전해주었다. 오프닝과 엔딩 공연으로 광명의 농부가수 김백근이 땅의 소중함을 노래로 부르기도 했다.

조선시대 영의정이라면 황희가 떠오르는데 왜 이원익에게 '영원한 영의정'이라는 이름이 붙는 걸까? 그것은 이원익이 선조·광해군·인조 3대에 걸쳐 무려 6번이나 영의정을 지냈기 때문이다. 그가 살았던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중반은 나라 안으로는 당쟁이 치열하고, 밖으로는 왜란과 호란을 겪던 시기였다. 이러한 때에 이원익은 백성과 국가를 위해 합리적이며 헌신적으로 국정을 운영하였을 뿐 아니라 당파색 또한 옅었기에 여러 왕들의 절대 신망을 받으며 영의정을 지낼 수 있었다.

이원익은 원래 왕실 후손으로 젊은 나이에 관직에 올랐지만 작은 키에 조용히 자신을 지켰기에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율곡이 마침내 그의 재주를 알아보고 정무를 맡기니 이후 뛰어난 실무 관료로서 활약하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터지고 선조 피난 당시, 이원익은 평안도 도순찰사로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고 민심을 수습하는데 힘을 썼다. 뛰어난 한어(漢語) 실력으로 명나라에 조선의 입장을 직접 전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신병주 교수는 요즘 KBS드라마 <징비록>에 별반 알려지지 않은 탤런트가 이원익 역을 맡는 등 비중이 작게 그려진 것이 아쉽다고 했다.

임진왜란 중 이원익은 이순신과 인연을 맺기도 했다. 우의정이 된 이원익은 한산도에서 이순신을 만나 완벽한 군비태세를 보고 소를 잡아 잔치를 베풀며 병사들을 격려하였다. 이순신 또한 이원익에 대해 군사들로 하여금 목숨을 아끼지 않도록 한 것은 상국(相國 : 이원익)의 힘이었다.”며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훗날 후손들의 혼인으로 두 사람의 인연이 이어졌으니 역사에 꽃 핀 아름다운 관계라고 하겠다.

국사 시간에 정말 중요하다며 배우는 대동법은 이원익의 가장 큰 업적이다. 광해군 즉위와 함께 이원익은 선조 대에 이어 영의정이 되었다. 이 때 전란 후 가뜩이나 어려워진 백성의 세금 부담을 줄이고자 단행한 것이 대동법 실시이다. 오늘날도 세제 개혁이라면 진통이 따르는데 당시 양반 지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를 실시하였으니 이원익의 애민사상이 아니었다면 가능치 못한 일이라고 하겠다.

인조가 즉위하자 이원익은 6번째 영의정 자리에 오른다. 1627년 정묘호란 당시 이원익은 81세의 노쇠한 나이임에도 "누워서 장수들을 통솔해도 될 것"이라는 인조의 신뢰를 받으며 도체찰사가 되기도 했다. 163488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이원익은 국가 원로로서의 소임을 다하며 '영원한 현역'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원익이 벼슬을 그만 두고 금천(衿川 : 오늘날 광명 소하리)에 와 방 두 칸인 초가집에 살았을 때 인조가 5칸짜리 집을 지어 하사하고 관감당이라 이름 붙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모든 이가 이원익의 청백리 삶을 보고 느끼도록 하라는 뜻의 집 이름이다. 이원익은 집안에서도 무덤을 쓰거나 제사 드릴 때 간략하게 하도록 하는 등 실용 정신을 발휘하였다. 때문에 그를 실학자로 봐야한다는 주장이 있는 등 그에 대한 새로운 평가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신병주 교수는 여태까지 조선 중기 인물 연구가 학파나 당파에 초점을 맞추었기에 실제 국정을 이끌었던 관료학자 이원익이 상대적으로 덜 주목을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삶에서 느낄 수 있는 청렴과 도덕성 그리고 백성과 국가의 필요를 짚어 내는 탁월한 능력은 오늘날의 공직자상 확립에도 필요하기에 반드시 재평가 받을 것이라 하였다. 신교수는 앞으로 이원익 유적지가 광명의 자랑거리이자 문화관광코스로 개발되리라 내다보기도 하였다.
 

 
이 날 사상 콘서트 참석자들은 시종 진지하고 깊은 관심으로 강연을 들었다. 행사를 주관한 광명문화원 이효성 사무국장은 과거엔 오리문화제라면 '오리고기 먹는 문화제냐?'며 농담하는 분들도 있었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광명시민들이 이원익 선생을 더 잘 알고 이런 자리에 오신다."고 했다. "문화원에 이원익 선생 관련 자료가 충분히 축적되어 있어서 영화나 드라마 제작 요청이 있으면 언제든 제공할 수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역사책 속의 이원익을 문화로 다시 불러 낼 때 광명의 이원익 대감은 온 국민의 롤 모델로 자리매김하게되리라 기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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