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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재상 경산(經山)정원용(鄭元龍)선생을 재조명 하다
명재상 경산(經山)정원용(鄭元龍)선생을 재조명 하다
  • 시민필진 김정옥
  • 승인 2019.12.02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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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시 학술대회

 

조선 후기 명재상 경산 정원용 선생 연구 학술 발표회가

지난 6일 오후2시 광명시민 연구학자 동래정씨 문중 등

12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시청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이는 광명시 향토 위인을 재조명하고 역사 문화적 의미를 되새겨보고자 마련되었다. 오리 이원익 민회빈  강씨에 이어 3번째 학술 발표회다.

박승원 광명시장은 “광명 역사에 관련된 옛것을 찾고 새롭게 배울 것은 배울 수 있는 전통문화를 계승하기 위해서 내년부터 전통문화팀을 신설 예정이다. 경산 선생의 학술회를 통해 온고지신의 자세로 성찰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학술발표회를 가슴 두근거리며 기다렸다는 경기도광명교육지원청 김광옥 교육장은 “정원용 선생은 인재를 많이 배출하셨고 지식인이며 공직자 문인으로 교육과 밀접해 광명이 자랑할 만한 위인이다. 학술회를 통해 더 많은 것을 학생과 후배들에게 깊게 전할 수 있게 됐다.”라고 했다. 정양모 (전)문화재청장은 “10년 전에 광명시에서 경산 정원용(동례 정씨26 세손) 고문서 해제 본을 보내주었다. 이는 경산 옹에게 4대에 걸쳐 왕이 하사한 교지와 친지에게 보낸 글을 모아 수록한 책에 해제를 덧붙인 것으로 아주 충실하게 엮은 책이다. 오늘 학술 발표회까지 개최되어 감사하다.”라고 인사말을 대신했다.

 

학술발표회는 1부 순서로 ‘전방위적인 지식인 정원용’을 주제로 허경진 연세대 교수의 기조강연에 이어 △심경호 고려대 교수의 ‘경산집을 통해 본 시인 정원용’ △구지현 선문대 교수의 ‘경산일록을 통해 본 생활인 정원용’
2부는 △천금매 중국 남통대 교수의 ‘연사록을 통해본 외교관 정원용’△김호 인천교대 교수의 ‘조선후기 유경의 전통과 정원용의 관형론’ △박혜민 연세대 교수의 ‘백과사전학자 정원용의 청진편금 필사본 소장 현황과 과제’ △최영화 중국 남통대 교수의 ‘목민관 장원용의 북방 인식’을 발표했다.

“‘광명’이란 두 글자를 지명으로 첫 번 기록 한 이는 경산이었다.”라고 허경진 교수의 기조연설 시작으로 6명의 교수가 연구한 경산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경산 선생은 가장 여성친화적인 인물이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아내가 세상을 떠날 때에야 제문이나 만시 묘지명을 지어 소극적으로 애정을 표현했는데 ‘오래 살라’고 수서(壽序)를 지어주었다. 정원용은 아내를 비롯한 가족 친지들에게 안부를 염려한 시를 많이 지었다. 가족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고 여성의 삶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순조 29년(1829년) 북관에 재해가 일어나자 회령부사로 차임되어 약 일 년 남짓 재임하고 총 219제 380수의 시를 수록한 ‘경산북정록’을 남겼다. 광명시 노온사동에 처음 집을 짓고 강원도에 갔을 때 아내에게 보낸 시 중에서 한편을 소개한다.

시흥 아왕리의 아내에게
그대와 해로하겠다고 약속하고
왕리(旺里)에 새로 전장을 열었지요.
해를 보내고 또 봄을 맞으니
봄볕이 점점따스해졌지요.
담백하게 소반과 탁자를 갖추고
정결하게 서재의 방을 청소한 다음
나는 누워서 책을 보고
그대는 앉아서 옷을 기우며,
아이들에게는 붓과 벼루를 펴 두게 하고
종들에게는 가래나무 뽕나무를 심게 하였지요.
샘물을 길어다가 차를 달여 마시고
해가 높이 뜰 때까지 평상에서 잠을 잤지요.

이렇게 다정다감하게 부인을 좋은 친구로 여성을 대접했던 경산은 91세 수명을 다하는 날까지 글을 썼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이는 세계역사에서도 드물다고 한다.


 

정원용 마음의 고향 광명시 노온사동
정원용은 죽은 부모와 살아남은 후손들이 편안하게 지낼 땅을 찾아 시흥에 정착한 것은 고향처럼 느긋한 시흥 주민의 습속이 자신의 성격과 맞았던 듯하다. 한성부 회현방은 경화세속(京華世族)들이 벼슬하기에 좋은 곳이었지만 시흥은 전방위적인 지식인 공직자 정원용의 생애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해준 곳이다.

경산 정원용 선생(1783~1873)은 한양에서 태어나 1802년(순조 2년)에 문관에 급제했다. 문(文) 사(史) 철(哲)을 겸비한 종합적인 지식을 겸비한 인문학적인 인물로 행정가뿐만 아니라 외교관 전고학자 문인으로 성공했다. 헌종 철종 순조 고종 4대에 걸쳐 72년 관직을 수행했으나 늘 검소하고 청렴결백했다. 1831년 동지사로 청나라 연경을 다녀왔고 59세 되던 해 1841년 우의정에 임명되어 재상만 33년 역임하였다. 조선왕조의 최고라는 수식어가 붙은 그는 영의정을 여섯 번이나 재임했던 명제상이다.

다양한 직위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여 전복(戰服)을 포함해 다양한 형태의 의복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실무 능력을 갖추었기에 19세기 풍양 조 씨와 안동 김 씨의 세도정치 속에서 제3자로 균형을 유지 할 수 있었고 유배도 가지 않았다. 그는 이름 순서까지 한자도 틀리지 않게 정확하게 평생 기록했다. 외교관 법관 재상 지방관 학자로서 개인으로서 많은 기록의 교훈을 남겨줬다. 정원용이 재상까지 오를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조정의 전고(典故)에 밝았다는 점인데 언제나 모든 것을 기록하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손님이 오면 아버지는 정원용을 불러 곁에서 기록하게 시켰다. 모든 기록은 후임자에게 도움을 주기위해 서였다. 이 때문에 국가가 위기에 닥칠 때마다 임금은 경산을 불러 위기를 다스리게 했다.

정원용은 각 벼슬에 있을 때마다 지은 글을 모아 초고를 편집하고 벼슬과 관련된 제목을 붙였다. 연세대학교학술정보원국학자료실에 ‘약산록(藥山錄)(1819~1822) 경산 북정록(徑山北征錄)(1829~1830) 기성록(箕城錄)(1833~1835) 등의 초고들이 소장되어 있다. ‘경산집(經山集)은 고종32년(1895)손자 정범조가 활자로 간행했다. 재상으로서 정원용은 군주를 보살피고 공봉 하는데 더 힘을 기울였다. 시에서도 각지의 풍토와 유적을 중시하여 기사기적시(記事記績詩)를 많이 지었다. 삼정의 문란을 바로 잡기위해 무리하게 새 법규를 시행하기보다 옛 법규를 그대로 시행하는 데 치중했다. 관례가 없는 사안들에 대해서는 새로운 전통과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진력했다. 행정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도 지방 행정의 문란과 민란이 발생하자 암행어사 제도를 부활시키자고 건의 했다. 중후한 재상의 덕을 지키면서 국정을 온건하게 처리하고 자 했던 풍모가 그의 시 세계에도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회령부사로 관직까지 낮춰 홍수가 나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백성의 마음을 알아 오도록 했을 때 북정록을 기록했다. 
유경록(維輕錄)은 법관으로서 기록한 것이다. 살인사건을 기록 정리한 책으로는 정약용(丁若鏞)의 흠흠신서(欽欽新書)가 가장 널리 알려졌지만 이는 정약용이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 정리하고 분석한 것이다. 유경록은 정원용이 현직에 있는 동안 그때그때 정리해둔 것이다. 조선시대 목민관들이 모두 살인사건을 조사하고 보고서를 작성하였지만 하나의 저서로 남겨놓은 사람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살인기록에 관한 보고서까지 중요하게 생각하여 독립된 저술로 정리해 놓았다.

 ‘연사록’을 통해 본 외교관 정원용에 대해 수많은 저술 중 1831년 48세 때 동지사행의 정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오면서 외교관 활동을 알 수 있고 조청 문화교류도 확인 할 수 있는 ‘연사록’ 2책을 소개했다. 이 책은 연행과정의 중요한 지점의 모습과 지리 상황, 지리 역사를 일기와 한시로 기록했다. 정원용은 연경에 가기전에 이미 청조문사들에게 알려졌고 그를 흠모하고 찾아오는 문사들이 많았으며 그에게 시문 서예를 구하는 자도 많았다. 조선의 위상을 높이고 문화를 전파하는데 공헌하였다.
 

 

정원용은 삼공(三公)을 거치면서 중국 조선의 전장과 의례에 관한 많은 기록을 수집하여 ‘문헌촬요’, ‘수향편’, ‘총진편금’ 등을 편찬하였다. 문헌촬요는 1851년 우리나라 상고시대부터 당대까지 문물제도와 그와 관련한 고사를 기록한 책이다. 수향편은 1854년 조선전장 의칙 및 사가(私家)의 덕행 선배의 문장과 이론을 모은 것이다. 총진편금은 중국의 것을 기록하였다. 이 책은 전 6권으로 ‘정회록’이라고도 한다. 정회록은 독서를 하다 키워드 중심으로 요약 발췌 한 것이다. 일본 정가당문고의 소장본을 저본하여 1984년 서벽외사해외수일본총서(栖碧外史海外蒐佚本叢書)로 아세아 문화사에 영인되었다. 그 외 연세대에 5.6권 동양문고에 1. 2권으로 낱장으로 소장되었다. 이 책에서 다루는 조목은 고실(故實) 위정(爲政) 형벌(刑罰) 경서(經書) 어휘(語彙) 문학(文學) 불도(佛道) 선도(仙道) 등 실로 다양하다. 총진편금의 향후과제는 글쓰기 방식이 아닌 시대적 위상을 밝히는 문제가 남아있다며 마무리했다.

목민관 정원용의 북방의식을 ‘북행수록을 중심으로 바라본 정원용이 회령 부사 재임기간 (1829.8~1830.12)에 지방관원으로 함경도 회령지역 및 북관(北關) 사정을 조사하여 기술 한 것이다. ’경산북정록‘의 5권~7권을 독립시킨 것이 ’북행수록‘이다. 군주에게 올릴 목적으로 실무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관북지방에 대해 역사적인 연혁을 소개하고 군사적시설과 장비 지리적 요건에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북방지역이 조선의 고토이자 국방 보위를 위한 중요한 지역임을 강조하고 군사적인 방비 능력에 초점을 두고 기술했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4가지 정책을 내세웠다.
1) 북방 변경이 중요하니 변방(邊防)체제를 강화 하자
2) 수해와 기아(饑餓)를 극복하여 민생안정에 주력하자
3) 조선 발상지인 북방지역의 문화를 발전시키자
4) 북방지역의 과거시험

기록을 중요하게 여기는 습관은 회현방 동래 정씨 문중의 특성이다. 정태화 경우를 들면 50대 후반까지 직무와 시기에 따라 포사일기 서행기 음빙록 기해일기 등의 일기를 기록했다. 그 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행적은 후손이 여러 기록을 수집 정리하여 연기초략(年紀抄略)이라는 책으로 보완 했다. 정원용의 필사본 저술은 다양한 글쓰기를 통해 조선시대 관원의 체계적인 기록태도를 보여준다. 90년 동안 기록한 ‘경산일록’은 17책 만해도 세계에서 가장 오래 쓴 일기다. 4대에 걸쳐 200년 가까이 총 51책의 일기가 이어졌으니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록을 검토 해볼 만하다.

 

양철원 광명시청 학예사는 “정진흡(경산 5대 손)선생이 기증한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경산 선생을 어떻게 지역사회에 가깝게 다가설 수 있을지 광명시와 학계의 숙제가 크다. 시민과 함께 계속 연구 할 것이다.”라며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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